다음의 글은 [진성희(2024). 인간 삶과 교육. 학지사]의 1장 나의 삶과 교육의 일부내용입니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배움과 성찰의 반복된 과정으로 채워진다. 인간 생활에 있어 교육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으며, 최근 평생학습사회의 도래로 인해 그 기여는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교육은 특정 시기에는 인생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대학생 시절도 이에 해당된다. 12년 이상의 시간을 배움에 헌신하여 드디어 입학한 대학에서 학생들 중 일부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배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학교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보다 고민을 적게 하곤 한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나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수함으로써 진화·발전되어 왔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타인과 교류하는 특이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으로 학습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채인선 동화작가의『배운다는 건 뭘까?』라는 책에서도 배운다는 것은 보고, 듣고, 읽고, 묻고, 따라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평생에 걸쳐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배우다'의 의미를 ①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②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③ 남의 행동, 태도를 본받아 따르다 ④ 경험하여 알게 되다 ⑤ 습관이나 습성이 몸에 붙다는 다섯 가지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배움에 대한 수동적 이해해 초점을 둔 입장은 노장철학 분야의 석학인 최진석 교수의 저서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책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에서 그는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보내버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배움을 끊으라고 권하고 있다.
"학생들이 죽어라고 배우는 모습을 두고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를 표현하려는 내적 배짱은 점점 줄어들 공산이 큽니다. 자기를 표현하려는 내적 충동이 점점 거세되어 버려요. 공부하는 내용으로 자신이 채워져서 그것이 주도권을 가져버리면 표면적으로는 똑똑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바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답은 잘하면서도, 질문은 잘하지 못하는 현상이 이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최진석 교수의 의견은 아마도 배움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만을 습득하고 따라 하는 수동적 배움은 그만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에서 교육철학자 강남순 교수는 "계속 배우라,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배움의 의미와 종류에 대해 주장하면서 최진석 교수의 의견에 반박하였다. 배움은 소극적인 배움과 적극적인 배움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강남순 교수는 소극적인 배움을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 적극적 배움을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에는 다른 사람의 지식만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능력을 갖기를 기대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육연구자인 김성길의 저서 『배움의 의미』에서 배움이란 '의미 찾기'와 '의미 만들어 내기'로 표현하고 있다. 배움의 주체가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데 남이 가르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암기하는 데 급급한 배움은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학교라는 물리적 환경이 아니더라도 '나'가 주체가 되어 일상생활을 할 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만들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기
"계속 배우라, 책 속에 길이 있다" 읽고 다음 질문에 생각해 보고 자신의 의견을 작성하세요.
출처: 강남순 (2017). 배움에 관하여. 도서출판 동녘, pp. 274-279.
우연히 “그만 배워라.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거짓”이라는 표제어로 공유되고 있는 한참 지난 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 기사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의 저자인 최진석 교수와의 인터뷰이다. 기사는 ‘기고문'이 아닌 ‘인터뷰'이기에 최진석 교수의 생각이 얼마만큼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추정할 근거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 인터뷰는 최교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들에게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인터뷰 기사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인터뷰 기사로 인해 생각하게 된 두 가지 질문,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책과 나의 관계란 무엇인가'에 관한 단상이다.
1.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계속' 배워야 하는 이유
인터뷰 기사에서 최 교수는 “배우는 데만 집중하면 거기에 빠져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돼버린다. 평생 남의 생각을 읽고, 남의 똥 치우다 가는 거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만 배워라”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대체 ‘배움'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인문학적 배움이란 ‘나' 속에 갇힌 ‘자기충족적 깨달음'만이 아니다. 나-타자-세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며 깨우침이다. 이러한 의미의 배움이란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며, 나의 ‘인식론적 사각지대'에 대한 지속적 인식을 통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확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배움'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다.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인식을 통하여, 그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배움이 이루어지는 통로는 매번 참으로 다양하며,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경험될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각의 인식론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배움을 멈춘 인간은 ‘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만 배워라”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배움이 왜곡된 배움이며, 어떤 종류의 배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 먼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배움 일반’이란 없다. 크게 보자면 두 종류의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
2. 두 가지 종류의 배움
또한 배움에는 나-타자-세계에 대한 ‘거시적 배움'이 있고 ‘미시적 배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타자-세계를 들여다보는 두 가지 접근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노자의 <도덕경>은 ‘거시적 배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도덕경> 자체에서 21세기 현대사회가 지닌 매우 구체적인 다양한 정황들에 대한 ‘미시적 배움'을 얻을 수는 없다. 인류 보편가치가 되고 있는 정의, 인권, 평화, 평등, 생명 등과 연계된 문제들은 ‘거시적 접근방식' 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현대사회에서 젠더, 인종, 종교, 계층, 섹슈얼리티, 국적, 장애 등 다양한 조건 속에 놓여진 ‘모든' 사람들이 ‘함께-살아감'에서 매우 중요한 다양한 정의들의 문제들은 노자의 철학과 같이 거시적 배움이 가능한 책만으로 배울 수는 없다. 그러한 책들은 구체적인 미시적 배움이 요청되는 정황과 연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젠더정의(gender justice), 인종적 정의(racial justice), 퀴어정의 (queer justice), 생태정의(eco-justice), 장애인들을 위한 정의 (justice for the disabled), 나이차별을 넘어서는 정의 (justice for the aged), 또는 '지구적 정의 (global justice) 등 다양한 '미시적 배움'을 주는 책들을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시적 배움과 미시적 배움 사이를 복합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오가는 배움이다.
3. 책 속에 길이 있는 이유
최 교수는 이어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책 속에는 책을 쓴 사람의 길이 있을 뿐, 나의 길은 없다. 나의 길은 나에게만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반쪽 진리'를 담고 있지만 나머지 반은 오류이다. ‘배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재규정해야 하는 것처럼, ‘책 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도대체 책이란 무엇인가. ‘나'와 ‘저자' 사이에 근원적인 분리와 단절이 있다고 이미 전제하고 있는 이러한 말은 이미 책의 의미, 저자 또는 독자의 역할, 그리고 읽기의 기능과 효과에 대한 ‘근대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은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근대적 이해로 볼 때, ‘저자'는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독점하며, ‘독자'는 수동적인 수혜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저자 기능'에 대한 근대적 오류의 하나이다. 책이 출판되자마자 저자는 사라진다. 소위 ‘저자의 본래적 의도 (original intention)'와 상관없이, 독자는 제2.제3의 ‘저자'로 기능하면서 ‘자기만큼' 책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어간다. 즉, 최 교수의 주장과 같이 “책 속에는 책을 쓴 사람의 길이 있을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나'는 나의 갈망, 욕구, 희망, 가치관과 만나고 또 새롭게 그것들을 창출하고 구성한다. 즉, 한 권의 책은 언제나 ‘나'를 통해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권의 ‘좋은’ 책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맹목적 ‘정보'가 아닌 다층적 ‘세계들’이다. ‘나의 존재함'이란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별적 나'는 타자와의 절대적 분리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좋은 책은 바로 나-타자-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담은 ‘다층적 세계(worlds)'와의 만남을 담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한 권의 책에서 제시하는 그 ‘세계'는 그 저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는 다양한 ‘세계들’인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심오한 세계들로 의 초청장이 되는 이유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홀로'이면서 동시에 ‘함께-존재'라는 것, 그 ‘홀로-함께 존재’로서 이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책임성, ‘좋은' 책이 우리에게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1) 저자가 제시한 네 가지 유형의 배움을 제시하시오. 저자는 어떤 유형의 ‘배움’을 강조하고 있는가?
2) 여러분은 현재 어떤 유형의 배움을 하고 있고 그러한 배움은 여러분의 자기계발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3) 저자가 강조하는 배움의 의미는 대학생으로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출발하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도전 혹은 결심을 주는가?
▷ 참고자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강남순(2017). 배움에 관하여. 경기: 도서출판 동녘.
김성길. (2009). 배움의 의미. 서울: 학지사.
최진석. (2015).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Wisdom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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